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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제1역사당안관은 명청 두 왕조의 중앙정부 및 황실에서 생산된 당안을 전문적으로 보존관리하고 있는 중앙급 국가당안관이다

by 쥬이대디 2020.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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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당안관에 소장되어 있는 방안

 

1천만 건(책) 정도이며 서가의 길이만도 50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전체 답안은 71全宗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명 대당 안이 1 전종이고 나머지는 모두 청 대당 안이다. 청 대당 안 가운데는 내각・내무부・군기처・궁 중당 안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생산된 당안은 명 홍무 4년(1371년)의 것이고, 가장 늦은 것은 청의 마지막 황제인 溥儀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기 직전인 1924년에 생산된 당안이다. 곧 중국제 1 역사당 안관에는 전후 55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생산된 당안이 소장되어 있다.

 

과거 오랫동안 명청당안은 궁중 깊숙이 소장되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고관대작들도 접근하기 어려웠으니 일반인들이 그 존재를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렇기에 건륭 연간 內閣中書를 지냈던 阮葵生은 “九卿, 翰林이라 할지라도 평생 단 한자도 보기 어려웠다”라고 적고 있다. 과거에는 尙書나 御史와 같은 국가 대정을 담당한 관원이나 修史를 담당한 한림들도 평생 궁중에 소장된 당안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국학연구의 대가인 王國維 또한 “3백여 년 동안 舍人과 省吏들이 관례에 따라 목록을 정리한 외에는 학사 대부라 할지라도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왕궈웨이의 말을 해석하자면, 궁중 소장 당안을관리하는 인원들만이 관례에 따라 목록을 편정하는 외에는 학자나 관원 가운데는 당안의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접근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던 관계로 청조가 멸망하고 10년이 지난 뒤까지도 이들 진귀한 역사자료는 오랫동안 궁중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었다.

 

1920년대 초의 중국사회는 매우 어지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공무원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당시 정부는 내 각 당 안의 일부를 제지공장에 팔아 급한 불을 끄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羅振玉과 같은 뜻있는 인사들이 즉시 행동을 취하여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 나진옥 등은 제지공장에서 펄프로 변할 위기에 처해 있던 8천 麻袋의 당안 가운데 7천 마대 분량의 당안을 수습하였다. 나머지 가운데 상당 분량의당안은 개인과 기구가 소장하게 되었고, 일부는 불행히도 훼손되고 말았다. 이것이 중국 당 안문 헌사에서 유명한 ‘8천 마대 사건’이다.

 

동안 일부가 궁 밖으로 유출되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국내외 학자들은 방안을 매우 중시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혹자는 명청당안을 敦煌藏經, 殷墟甲骨과 함께 20세기 중국 고문헌의 ‘3대 발견’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明淸檔案과 殷墟甲骨, 居延漢簡, 敦煌經卷을 중국의 ‘4대 문화유산’이라고 평한 이도 있었다.

중국제 1 역사 당안관 소장 명청당안의 절대부분은 漢滿 등 중국문자로 기록된 당안이다. 물론 소량이기는 하지만 日朝 문자 등 외국문자로 기록된 당안도 없지 않다. 재질은 종이가 대부분이지만 나무・금속・비단・가죽 등 재료를 이용한 당안도 섞여 있다. 크기로 치면 단 몇 글자가 적혀 있는 작은 메모지부터 엄청나게 두꺼운 책까지 더욱 다양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제1역사당안관 소장 서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 것은 1921년 찬수 된 ‘皇家玉牒’으로 24 ×90센티미터의 크기에 두께가 90센티미터, 중량이 200킬로그램에 달한다. 이 책에는 10만여 명에 이르는 황족의 정보가 담겨 있다.

길이가 가장 긴 「金沙江上下游山水圖」는 50센티미터의 넓이에 길이가 77.4미터에 달한다. 금사강 수운의 개발과 이용을 위해 사람을 보내 실지 탐사 후 그린 이 그림은 금사강 간류의 격류와 험한 여울의 위치, 물살이 평온한 구간 및 양안의 생김새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화물운송 시 물살이 평온한 구간에서는 배를 이용하다가 격류나 여울이 있는 구간에서는 산길로 바꾸어 말을 이용하고, 물길이 험한 구간을 지나면 다시 수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물길과 산길이 바뀌는 곳에는 사람과 말이 휴식하고 화물을 보관할 수 있도록 역참을 두었다.

중국 전통 회화기법을 이용하여 그린 이 그림을 보면 물길의 평온함과 거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안의 산봉우리와 구불구불한 산길, 푸른 나무와 그 그림자까지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림 속의 사람과 말은 콩알만 하게 작게 그려져 있지만 머리카락까지도 묘사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실용가치가 매우 높은 ‘水文地理圖’이자 예술적 가치 또한 매우 높은 회화작품이라 하겠다.

중국제 1 역사 당안관 소장품 가운데 화폭이 가장 큰 그림은 건륭대에 그려진 「京城總圖」이다. 수많은 낱장 그림이 합쳐진 이 그림에는 청조극성시기 북경성의 전모가 담겨 있다. 궁전・민가・대로・골목・하천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 그림의 낱장을 모두 합친 면적은 180여 평방미터에 달한다.

중국제1역사당안관 소장 동안에는 14세기 후기부터 20세기 초기까지 다사다난했던 중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들 당안은역사의 흐름 속에서 명청 중앙정부와 황실이 남긴 원시기록의 집대성이다. 당안은 정치・경제・군사・문화・예술・민족・종교・외교・과학기술・천문・지리・기상・중대사건・중요 전장 제도・중요 역사인물 등 다방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문서의 종류는 크게 보아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행 문서로 황제가 신민에게 반포한 詔書・誥命・諭旨 등 명령류 문서이다.

두 번째는 문무백관이 황제에게 올린 題本・奏折・進單 등 상행 문서이다.

세 번째는 관부 각 아문 간 혹은 나라와 나라 간에 주고받은 咨文・照會・國書・條約・函 등 평행 문서이다.

네 번째는 起居注・實錄・聖訓・會典・方略・輿圖 등 史官의 기록 및 관수 사적이다.

다섯 번째는 皇家族譜나皇室錢糧帳簿 등 황실 및 황족 사무와 관련된 방안이다.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이들 역사당안의 가치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당안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명대의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창건에서 쇠망에 이르기까지 청조의 모든 역사를 있는 그대로 계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숨겨져 있는 역사정보는 풍부함과 체계적이라는 특징 외에도 신뢰성과 권위면에서도 동일시기 생산된 세계의 모든 당안 가운데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다.

 

1925년 전문 관리기구가 설립된 이래 명청당안은 황실의 비장품에서 국가문화유산으로 그 성격이 일변하였다. 훌륭한 사회문화자원인 명청당안에 담긴 풍부한 역사함의를 탐구하기 위해 그간 많은 연구자들이 부단히 노력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당안들을 대부분 수습하여 이제 내각당안의 원모를 거의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각계도 명청당안의 정리・보호・이용 등 방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근 90년 동안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 보존과 정리작업을거친 명청당안은 이제 사회발전과 진보에 중요하고도 독특한 작용을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만 개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국가경영의 지침이자 증거로서의 작용이다. 국경선 획정, 주권 수호, 홍콩 반환, 마카오 반환 등 중대 사안의 처리과정에서 역사당 안은 중요한 증거로서 작용하였다.

 

둘째, 역사연구의 보고이다.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장점을 살려 중국제 1 역사 당안관은 지난 수십 년간 각양각색의 당안사료와 목록 2천 책을 편집 출판하여 학술연구 발전에 공헌하였다.

 

셋째, 淸史 편찬 작업의 초석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정식으로 청조 역사 편찬 작업이 시작되면서 청 대당 안의 정리 편찬이 첫 번째 임무이자 과제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중국제 1 역사 당안관은 3백만 건에 달하는 마이크로 및 디지털화 당안을 제공하였다.

 

넷째, 역사와 지방지 편찬의 기초자료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 각계의專門史, 行業史, 지방지 편찬과정에서 명청당안이 매우 중시되고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다섯째, 고건축물 수리와 복구 시 전거로서의 작용이다. 수많은 중요 역사 건축물의 보수와 중건 과정에서 역사당 안이 주요한 참고가 되고 있다.

 

여섯째, 사회문화생활의 발전을 위한 자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전시 등 각종 방법을 통해 역사당 안은 중국 전통문화의 높은 수준을 널리 알리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동시에 역사당안은 수많은 예술인들이 영감을 얻는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사회도 중국제 1 역사 당안관 소장자료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본관에 소장되어 있는 『滿文秘本檔』, 『淸代金榜』은 1999년과 2005년 각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중국제 1 역사 당안관은 유네스코가 주관하는 ‘세계의 기억 사업’에 등재 신청을 하여 선정된 중국 내 첫 번째 당안관이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명 숭정 연간인 1630년대에 제작되어 현재 본관에 소장되어 있는 『赤道南北兩總星圖』는 중국에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대형 천문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시의 예 부상서・문연각대학사이자 저명한 과학자이기도 한 徐光啓의 감독 아래 황제 전용으로 제작된 이 천문도는, 독일 출신의 선교사 湯若望(Johan Adam Schall von Bell) 등이 설계와 제작에 참여하였다. 중국 고대 별자리 그림의 내용을 계승하면서도 유럽 천문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이 그림은 당시 동방 星象學을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2014년 이 그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세 계기 록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중국 국가당 안국의 통일적 영도 하에 본관 소장 기타 방안들에 대해서도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진귀한 당안들이 전 세계에 소개되어 인류문명과 사회진보에 커다란 공헌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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