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 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는 매우 오래되었다.
처음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중국 수나라 때인 서기 7세기 초엽이다. 14세기 후반 명나라가 건립되면서 중국과 유구 사이에는 번속관계가 확립되었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왕조가 바뀌는 경우에도 변함없이 종번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비록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조공과 책봉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긴밀하고 우호적인 쌍방의 관계는 청대 광서 초년 일본 明治政府가 강제로 유구를 병탄 할 때까지 전후 5백 년간이나 이어졌다.
1840년 이전까지 중국과 외국 사이에는 현대적 의미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중국과 외국(주로 주변 국가) 간에는 번속봉공 제도를 통한 상호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번속국과의 교류과정에서 중국 은상 국을 자처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번속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번 봉정 책을 취하였다. 번속국이 조공을 바칠 때에도 공물에 비해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고, 대가를 바라거나 이익을 취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주변 환경을 조성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런 관계는 근대 서방 식민주의 종주국과 식민지 간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중국과 유구 간에 장기간에 걸쳐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면서 종번책공・경제무역・해난구조・문화교류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다량의 방안이 생산되었다. 청 대당 안에는 유구국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공물을 바쳤으며 동시에 무역을 행한 기록이 다수 보인다. 일반적으로 청 황제는 유구의 사신을 잘 대접하고 공물에 비해 훨씬 많은 물품을 하사하는 한편 무역 세액을 감면해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유구의 왕이 서거하고 새 왕이 계위 할 때, 청 황제는 매번 사신을 파견하여 선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새 국왕을 책봉하였다. 유구 어민들이 조난을 당할 경우 청 황제는 그때마다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공금을 쓰는 것을 허락하였다. 원래 유구 국도 역사당 안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역사기록의 부재는 민족의 아픈 상처가 아닐 수 없다.
1991년 3월, 중국제 1 역사 당안관과 일본 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 간에 협정이 체결되어 본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유구 역사 관련당안의 공동개발과 연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쌍방은 지금까지 10차례 중국-유구 역사 관계 연토회를 개최하여 역사교류 중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깊이 있는 의견을 나누었다. 그 결과물로 『淸代中琉關係檔案選編』 8 책, 『中琉歷史關係檔案』 총 편 26 책, 『淸代琉球國王表奏文書選錄』 1 책 등이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1,800건에 가까운 관련 역사당 안이 수록되어 유구 민족 역사기록의 공백을 상당 부분 메워주었다.
뿐만 아니라 연토회에서 발표된 글들을 모은 논문집 10 책도 발간되었다. 여기에는 동아 관계사, 무역사, 동북아와 동남아 각국 및 지역의 관계 등에 관한 역사적 가치와 중요한 현실적 의의를 담은 우수한 글들이 실려 있다. 당안편찬의 성과물과 논문집 한 책 한 책은 모두 쌍방 학자들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자 합작의 결실이기도 하다.
이상의 결과물들은 또한 청 대당 안의 소중한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작용을 하였다. 나아가 역사자료의 공백을 메워주어 유구 역사의 정리와 역사연구 진행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쌍방의 교류와 이해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외에도 본관은 일본 山梨大學, 국립공문서관 등 기구와도 합작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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